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셀림 2세 (문단 편집) === 골육상쟁 === 본래 [[쉴레이만 대제]]는 셀림이 아니라 후궁인 마히데브란 술탄의 자식이었던 무스타파 왕자를 후계자로 정해놓았다. 하지만 마히데브란을 제치고 쉴레이만 대제의 정식 황후가 된 [[휘렘 술탄]]은 자신의 아들이 쉴레이만 대제의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다. 본래 휘렘은 술탄의 총애를 받는 대신에 무스타파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한다는데 동의했지만 휘렘은 배다른 자식이 왕위를 잇는 것을 원치 않았고 휘렘과 그녀의 사위 뤼스템 파샤[* 휘렘과 술레이만 소생 황녀인 미흐리마와 결혼했다.]의 음모에 휘말려 무스타파 왕자는 반역 혐의로 사형당하였다.[* 당연히 무스타파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은 사실무근이었다. 게다가 무스타파 왕자는 자신의 영지에서 선정을 베풀고 있었기에 그가 처형당한 후 무스타파의 부하들과 영지의 주민들은 불만을 품었고, 당시 [[발칸 반도]]의 한 지방관은 자신의 이름도 '무스타파' 라는 점을 이용하여 사실 무스타파 황자는 죽지 않았고 자신이 바로 그라며 '''진짜 반란'''을 일으켰다.][* 아버지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한 셀림과는 달리 무스타파는 군주로서의 자질이 상당히 뛰어났던 모양이다.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코스탄티니예 주재 대사였던 오기에르 기셀린 드 뷰스벡(Ogier Ghiselin de Busbecq)은, 무스타파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을 정도이기 때문. '쉴레이만의 아들들 가운데 무스타파라는 자가 있는데, 놀라울 정도로 잘 교육받았고 사려 깊으며 이제 24세 또는 25세이기에 제위에 오를 만한 나이가 되었다. 부디 신께서 그런 힘을 가진 바르바리인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도록 해주시길 바랄 뿐이다.' 다만 뷰스벡이라는 인물은 오스만빠 기질이 다분했던 인물이라는 점은 유의.] 무스타파가 처형되고 무스타파를 좋아하던 막내 지한기르도 우울증으로 덩달아 죽어버린 후[* 지한기르는 총명하기는 했으나 몸이 약했으므로, 원래부터 황위 계승자로서는 부적격 판정을 받고 있었다. 쉴레이만이 평생 열 세 번의 친정(親征)을 단행한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유사시에 친히 군대를 이끌기도 해야 했는데, 지한기르에게는 이게 불가능했기 때문. 다만 그가 죽은 원인은 사료에도 ''슬픔'으로 죽었다' 라는 식이므로, 살해당한 거 아닌가 하는 의문도 살짝 제기할 수 있을 듯 하다.] 셀림은 유력한 왕위 계승자가 되었으나 또 다른 야심만만한 왕자였던 동모동생 바예지트[* 바예지트도 셀림보다는 능력이 있는 편으로 여겨졌다.]도 왕위 계승을 노리고 있었다. [[휘렘 술탄]]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둘 다 휘렘의 아들인지라 갈등이 겉으로 표면화 되지 않았지만 휘렘 술탄이 죽은 후에는 형제간의 갈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바예지트는 셀림을 견제하기 위하여 셀림의 영지인 마니사로 통하는 무역로를 훼방놓기 시작했고 형제간의 갈등이 깊어지자 부황인 쉴레이만은 셀림과 바예지트의 영지를 바꾸는 방식으로 갈등을 무마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부황의 말에 순종한 셀림과 달리 바예지트는 쉴레이만의 명령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바예지트가 받은 영지는 무스타파의 영지였던 아마시아였다. 게다가 무스타파 황자를 자칭한 지방관이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발칸 반도 전체를 통치하고 있던 인물이 바예지트였는데, 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억울하게도 쉴레이만은 바예지트가 일을 제대로 했다면 어찌 반란이 일어났겠느냐는 식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결국 쉴레이만은 계속 자신에게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는 바예지트 대신 셀림을 후계자로 인정하기로 하고, 당시의 부재상이었던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에게 셀림을 도와 바예지트를 토벌할 것을 명했다. 결국 두 황자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고, 승리한 쪽은 셀림이었다.[* 다만 셀림이 스스로 바예지트를 격파한 게 아니라,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의 활약이 절대적이었다. 이때문에 셀림은 황위 계승 분쟁에서 승리했으면서도 황제로서는 막장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패배한 바예지트는 [[사파비 왕조]]로 도망쳐 [[타흐마습 1세]]에게 몸을 의탁했고 타흐마습은 바예지트를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이전에 쉴레이만이 타흐마습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던 황족을 앞세워 페르시아를 침공한 일이 있었기에, 바예지트도 비슷하게 활용하려는 것이었던 생각으로 보인다.], 쉴레이만은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에게 명하여 바예지트를 돌려받는 몸값에 대한 협상을 할 것을 지시. 결국 타흐마습은 오스만 제국이 보낸 처형인이 바예지트 일가를 처형하는 것에 동의했고[* 사실 이때 사파비 페르시아는 쉴레이만의 [[오스만 제국군]]에게 대패하여 큰 타격을 입었던터라 오스만의 요구를 들어줄수밖에 없었다.] 바예지트는 일가족과 함께 처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